여리고의 눈먼 사람 바디매오에게 예수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막 10:51). 그가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예수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간절한 바람을 갖는 것을 믿음이라고 칭찬한 것이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고 병이 낫게 되었을 때도, 예수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격려해 주었다(막 5:34).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간절한 소망을 말했는데 바로 이것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칭찬한 것이다. 예수는 병들고 장애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병이 나을 수 있고 장애가 극복될 수 있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예수가 병을 고쳐 주고 기적을 일으킨 일들은 대개 이런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는 가운데 일어난 것들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안 된다’거나 ‘너는 안 된다’는 식의 절망적인 말이나 거절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어린시절은 대개 갖고 싶은 것은 많아도 그것을 손에 넣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가 꼭 갖고 싶었던 것들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몇 개 있다. 미술시간에 흔히들 12색짜리 신신파스나 24색짜리 지구파스 같은 것을 썼는데 가끔 부잣집 아이들은 그런 크레파스의 두 배 내지 네 배 정도 큰 2단짜리 왕자파스를 갖고 다녔다. 난 그게 있으면 그림을 더 잘 그릴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한 적이 많았다. 어느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호랑이 토퍼가 유행했지만 한 반에 여남은 명이나 입을까 말까 했다. 스케이트나 기타, 셰익스피어 전집 같은 것이 갖고 싶은 적도 있었다. 난 이런 것들을 갖고 싶은 대로 갖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늘 감사하는 것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우리 경제 형편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갖고 싶어서 어머니께 슬쩍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것을 살 수 있느냐고 펄쩍 뛰지 않으셨다. 그냥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 동의해 주고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함께 길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뭔가 희망을 잘라버리지는 않으셨다. 어떤 경우에는 가느다란 희망 같은 것을 잡고 노력하다가 결국 그것을 손에 넣기도 하고, 셰익스피어 전집 같은 경우에는 외상으로 사서 한동안 보다가 결국은 갚지 못해서 되돌려 주기도 했다. 이러는 가운데 내게 생긴 것이 있다면, 뭐든지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능성을 찾다보면 실낱 같은 가능성이 점점 확실한 현실성으로 다가오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뭐든지 안 된다고 거절해버리거나 겁먹기보다는, 먼저 소망을 품고 꿈을 꾸어보고 어떻게든 그것을 이루어보려고 노력해나가는 재미랄까 기쁨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내게 무엇을 사 주신 것보다도 그런 기쁨을 터득하게 해 주신 것이 참으로 고맙다.
예수를 만난 이후의 삶도 늘 그런 식이었다. 난 어머니께 조르듯이 예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기도하는 동안 난 늘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갖는 사람이 되었다. 때로는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소망이 없어진 적은 한번도 없다. 내가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난 늘 예수 안에서 소망 가운데 산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고맙고 행복하다. 예수는 바디매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은 것처럼 지금 내게도 똑같이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나의 기도가 된다. 소망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고 행복한 것이다.
최근에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저소득층의 교육복지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대도시 빈민 지역 초등학생과 중학생 가운데 30%가 자신의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일수록 ‘노력하면 목표나 희망을 이룰 수 있다’는 데 대해 부정적인 답을 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어느새 ‘가난한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말이 자취를 감추었다. 지난해 서울대 신입생들의 아버지 직업 분포를 보면, 기업체 간부, 고급공무원 등 관리직이 28%, 의사, 교수, 법조인 등 전문직이 24.8%였다고 한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수이다.
바디매오보다 또 우리의 어린 시절보다는 훨씬 더 잘 사는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어찌하여 이렇게 자신의 미래에 대해 소망을 갖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의 어린 시절은 분명히 오늘날 청소년들보다 더 가난했다. 하지만 그때는 오늘날만큼 상대적 박탈감이나 빈곤감은 크지 않았다. 그땐 다들 가난했고,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나 죄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 빈부격차가 커지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부모를 잘 만나서 서울의 특수한 지역에 살아야 학원 가기도 좋고 학군도 학교도 좋고 경쟁상대도 좋아서, 좋은 대학에 가서 취직도 하고 인맥도 이루고 이 사회에서 행세하며 살아가게 되는 구조다. 이런 구조를 눈치 챈 그들은 이미 그 대열에 들어가지 못한 자신들은 노력해 봐야 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절망감이야말로 가난이나 굶주림보다도 더 사람을 파괴시키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의 일을 따라 하는 곳이라면, 오늘날 이런 박탈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이런 사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교회들 간의 빈부격차가 너무나 벌어지고 있다. 수천 수만 명의 교인 수에, 시골교회 성직자의 몇 십 배가 넘는 사례비를 받는 성직자가 있는가 하면, 교회 건물 유지비도 내지 못해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성직자도 있다. 강남의 대형교회와 서울 변두리의 교회는 말로는 같은 주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어울리기가 힘들 정도로 생활 정도나 의식에서 차이가 난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슨 무슨 기도를 얼마 동안 하기만 하면, 집이 생긴다, 무엇이 생긴다 하면서, 소망의 근거를 이 세상에 두고 있다. 누구는 예수를 믿었더니 아들이 일류대학에 갔다, 누구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더니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다, 누구는 그렇게 헌금을 많이 하더니 몇 배로 부자가 되더라,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은 예수를 믿어서 저렇게 부자가 되었다, 그러니 예수 믿으면 우리도 부자 되고 출세하고 강대국이 된다, 이런 식으로 소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 예수를 빙자한 이 세상의 소망이지, 예수가 주는 소망이 아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자식이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자기들이 집을 사고 더 잘살게 되는 미래를 소망하면서 기도를 한다. 하지만 예수가 한 것처럼, 지금 눈을 뜨고 싶어 하고, 병을 낫고 싶어 하는, 작은 사람들의 소망을 소중히 받아주고 들어주는 일들은 별로 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크리스천의 소망을 이런 세상적인 성취 위에 세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웠다. 예수는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을 내주었으며, 그러는 가운데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던 예수는 이제 크리스천의 희망의 근거가 되고 희망 그 자체가 되었다. 바울에게서 희망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나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에 대해 말하면서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라”고 한다(롬 12:12). 흔히 세상 사람들은 즐거움이나 기쁨은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온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거나 어떤 목표에 도달했을 때 환호성을 지르고 축배를 든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성취가 이루어지기 전에, 아직 목표한 것이 소망 가운데 있을 때, 기뻐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직 대학에 가지도 않았는데, 대학에 갈 소망을 갖고 공부하는 고3학생, 재수생에게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에게 그 미혼 시절에 결혼할 소망 가운데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 사회의 논리로 치자면, 대학에 가기 전까지 모든 고3과 재수생은 불행하고, 결혼하기 전까지 모든 처녀 총각은 불행하고, 서울 중심지의 멋진 아파트와 근사한 자가용을 사기 전까지 모든 신혼부부들은 불행하다는 식의 얘기가 된다. 그런 식으로 살다 보면 늘 속아 사는 인생이고 백발이 되어서도 늘 불행하기만 한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어도, 실패가 있어도, 문제가 있어도, 그것보다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하는 가운데 즐거워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바울은 우리가 바로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소망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한다(롬 8:24). 이미 성취된 것은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성취한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 크리스천은 이렇게 배가 부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 소망 가운데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한다(고전 15:19).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 그들 가운데는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이요, “약한 것”이요,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이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한다(고전 1:26-28). 그 외에도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이라는 가정에서 그런 생각은 뒤집힌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갖는 소망은,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소망은 이 세상에서의 성취나 잘 사는 삶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비참한 삶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소망 가운데 사는 삶이다.
이제 난 더 이상 왕자파스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왕자파스에 대한 기억은 내게도 뭔가를 간절히 갖고 싶어 하는 소박한 소망이 있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것은 분명 아련하면서도 행복한 기억이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기를 바란 것이나 혈루증 앓던 여인이 병이 낫기를 바란 것은 그들의 인생 전체가 달린 간절한 것이었다. 그들의 그런 소망에 비하면 나의 어린 시절의 소망이라는 것은 철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지금 나의 생각이다. 그때 그 소년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그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는 그런 간절함을 알았다. 그 누구도 바디매오나 혈루증 앓는 여인의 소망에 관심하지 않을 때, 그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대해서 그는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거나 ‘뭐 그런 걸 다 가지려고 해?’ 하지 않았다. 대신 뭔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었고, 그 소망을 들어 주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를 따라서 작은 사람들이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내가 소망을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가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도록 예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은 또 다른 그 누군가가 자기만의 ‘왕자파스’를 갖고 싶다고 말할 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고, 그에게 동의해 주는 것이고, 그가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작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 훨씬 더 긍정적이 되고, 무엇이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소망이다. 그리고 이젠, 이 예수가 우리의 소망이다.(기독교사상 200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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