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엽

분노는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고 있다. “형제”가 마음에 들지 않

아 분노와 멸시로 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천국인 됨을 점검해 보

자. 우리의 악행을 정검 할 때 그 뿌리에 분노와 멸시가 자리잡고 있는 것

을 보게 된다. 분노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연발생적

기능이다. 분노는 우리의 의지가 방해 받을 때 일어난다. 분노는 나와 우리

의 스트레스 치수를 높인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분노는 내 의지의 방해

세력에 대한 경고를 통해 나의 생각이 정돈되기도 전에 경계와 저항으로 맞

서게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분노에는 어느 정도 악의가 들어 있

다. 분노는 나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싸늘한 시선(혹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것), 언성을 높이는 것(혹은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 ….

우리는 분노하기로 의지적으로 결정할 수 있으며 많은 경우 실제로 그렇게

한다. 처음에는 자연히 발생한 분노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고의로 그 속

에 빠진다. 우리에게 분노의 격류가 준비되어 있어 조그만 일 하나로도 즉

각 폭발하는 것이다(CF. 운전 중 분노). 분노는 그 자체가 숨길 수 없다.

존재 자체만으로 나와 우리의 환경을 장악한다.


사람들은 왜 분노를 품고 키우는가? 이 문제는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분노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 의 와 허영심이 있다. 그것은 상한 자

아의 두 주역이다. 상황이 지난 후에도 분노를 두고 두고 품고 있어 분노

를 식지 않게 하려면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 받고 있다는 생각하고 용납 못

할 불의에 대한 자신의 편을 찾으면 된다.


분노로 해결되는 일은 없다. 분노가 없어서 악화되는 일은 없다. 의지적

분노에 담겨 있는 한 조각 달콤한 자기 의는, 상대방의 자기 의의 반응이라

는 값비싼 대가를 가져 올 뿐이다. 분노가 지배하는 한 그 악순환은 끝이

없다.

그러나 멸시는 분노보다 훨씬 악하다. 멸시는 고의로 상대를 깍아 내리

는 것이다. 멸시는 우리의 삶 속에 분노보다 더 만연해 있다. 멸시는 어느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선하지 않다. 아람어 단어 ‘라가’는 예수

님 당시에 상대를 경멸의 대상으로 몰아 붙이며 멸시의 표현으로 흔히 사용

되는 말이다. 목구멍에서 침을 모아 뱉을 때 나는 소리에서 유래한 단어

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멸시는 상대

를 배제시키고 따돌려 소외시킨다. 멸시가 잔인하게 우리의 관계를 깬다.

그럼에도 대단히 세련된 모습으로 행해질 수 있다. 소속은 인간의 영적 본

성에 기반을 둔 아주 중요한 필요이다. 멸시는 이 깊은 필요에 침 뱉는다.

멸시는 하나의 예술(?)이다. 멸시의 대상과 방법을 모르는 것은 장래성이

없는 증거이며, 스스로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확실한 신호이다.


“미련한 놈(개**, 쌍*)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 가게 되리라” 이

안에는 분노와 멸시가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하나

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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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엽 2001/05/11 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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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엽 2001/05/11 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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