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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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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밀양」(Secret Sunshine, 密陽)에 대한 목회적 고찰 (이문식/산울교회 담임목사)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기독교의 주제 「용서와 구원」을 정면으로 무게 있게 다룬 수작이다.

김기덕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보여지는 기독교의 이미지는 지극히 냉소적이거나 아주 희화적(戱畵的)이다(「친절한 금자씨」의 목사). 그러나 이창동의 「밀양」은 아주 진지하다. 기독교에 대해 피상적이거나 상투적인 접근을 넘어서서 인간의 고통과 용서, 그리고 구원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깊이 있게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우리 사회 내부에서 나온 또 하나의 텍스트(Text)라면,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작업 또한 우리 시대의 목회자가 피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해석학적 작업」이다.

Ⅰ. 이 영화의 메시지

이 영화는 「하늘」로 시작해서 「땅」으로 끝난다. 카메라의 초점은 「새파란 창공」에서 시작해서 「마당의 지저분한 개숫물」로 끝을 맺는다.

이에 대해 이창동 감독은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 있다는 걸 <밀양>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고 하였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구원의 관념성」이 아니라 「구원의 현실성」에 대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이 관념(혹은 환상)과 현실사이에, 하늘과 땅 사이에 바로 신비스럽게도 ‘햇빛’만이 가득하다. 이처럼, 「햇빛의 비밀」은 바로 그 둘, 하늘과 땅의 간극을 채우는데 있다. 이 영화에서 「하늘의 햇빛」보다도 더 강조되는 것은 바로 「땅의 햇빛」이다. - 질펀하게 고인 마당의 개숫물을 번쩍거리게 하는 라스트 신의 빛의 은닉성, 그 간접적인 존재성은 다분히 「성 육신적인 빛」(Reincarnation of the Light)을 의미한다.

인간의 고통과 눈물과 회한이 질펀하게 깔린 개숫물의 반짝거림도 바로 빛 때문이다. 빛은 고통 속에 벌거벗은 인간의 실존을 감싸는 또 하나의 신비이다. 이 빛 사이로 여주인공 「신애」(전도연 분)의 실존적 새 출발을 의미하는 잘려나가는 머리칼들이 흩어진다.

이처럼 「밀양의 빛」은 신비스러운 이중적 상징성을 드러내며 영화 전편의 주제부를 구성한다. 이 빛은 환상과 현실사이를, 구원과 고통 사이를, 신과 인간 사이를 말없이 연결시켜주고 있다. 지극히 비밀스럽게….

이 빛의 상징 - 밀양의 의미는 무엇인가?

Ⅱ. 환상으로써의 밀양

신애에게 소도시「밀양」(密陽)은 일종의 파라다이스 - 환상의 피난처이다.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密陽)」으로 이주하는 신애는 이미 서울에서 「단란한 가정 속, 행복한 30대 주부」라는 소박한 꿈이 철저하게 깨어진 고통의 존재이다. 이미 남편의 죽음과 함께 그의 외도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친어머니나 남동생이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는 신애의 행위가 바로 이 신애의 「밀양행」이다.

철저한 배신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외도한 남편의 고향으로 이주하는 신애는 과연 무엇을 「밀양」에서 구하는 것일까?

일종의 환상이다. 현실의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자기만의 환상이다. 그것은 「죽은 남편을 열렬히 사랑하는 아내로 남편의 분신과 같은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미망인」이라는 자아의 환상을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다시 재현함으로써 자기 속에서 이미 깨어진 그 행복의 환상을 다시 봉합해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인 것이다.

그래서 수시로 접근하는 종찬(송강호 분)을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만날 뿐, 그녀는 계속 거부한다.

밀양(密陽)에서 빚어낸 이 환상 속에서 신애는 무척 행복하다. 그래서 그녀를 불쌍히 보고 기독교신앙을 권유하는 여약사에게 그녀는 자신이 행복한 여자임을 천명한다.

‘햇빛처럼 어느 곳에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여약사의 전도 앞에서, 그녀는 약국 한 구석에 비취는 빛 안에 손을 넣으며 ‘하나님이 어디 계세요?’라며 웃는다.

약국 한 구석을 비추는 「비밀스런 햇빛 」은 그녀에게 오직 「神의 不在」를 알려 줄뿐이다. 아직도 그녀는 밀양의 빛 속에서 자기 환상의 한계를 보지 못한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환상의 관념적 행복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처럼 소도시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은 그녀에게 일종의 관념적 파라다이스인 것이다. 이것이 허위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는 내러이터가 바로 종찬(송강호 분)이다. 반복되는 그의 대사 “밀양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요”는 그녀의 밀양의 환상이 곧 깨어질 것임을 넌지시 암시한다.

Ⅲ. 종교적 환상 - 밀양

밀양(Secret Sunshine)은 신애가 「아들의 상실」이라는 엄청난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또 다시 도피하는 「종교적 환상」으로써 현실의 기독교다. 그러나 상투적인 기독교의 관념적인 구원과 용서의 환상은 여지없이 처절한 현실 앞에서 또다시 깨어진다.

아들의 죽음은 신애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행복의 환상을 구성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시킨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재해석하는 기독교에 쉽게 의지하게 된다. 고난이 은총이 되고,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는 - 기독교의 역설적 메시지는 인생의 불가해한 위기에 몰린 신애에게 유일한 도피처가 된 것이다.

그녀는 열렬한 기독교인이 된다. 그녀의 개종에는 이처럼 ‘자기애적 환상(自己愛的 幻想)’이 숨어있고, 그 환상이 신앙의 매개가 된다. 그래서 신애에게 종교는 일종의 정신적 아편이 되고 만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기독교의 부흥회 - 치유집회에서 보이는 그녀의 반응은 전인격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신 병리학적인 것이다. 그녀의 신앙양태는 아직 인격 안에 체화(体化)되지 못했으며, 그 내면에는 여전히 종교적 환상을 좇는 공허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신애는 자기의 종교적 환상 ‘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는 환상’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마지막 내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애적인 도박이다.

즉, 자기 아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웅변학원 원장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개인의 환상」이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증명」을 받아야 한다. 신애에게는 그 증명이 바로 「용서」라는 「종교 의식」이다. 신애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의식은 너무도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용서해야할 대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신이 이미 그자를 용서해 버렸기 때문이다. 교도소 안에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한 살인범은 이미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신애는 절규한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냐 말이예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

용서는 하나님의 은밀한 빛이다. 이 빛이 자기를 거치지 않고 살인범에게 직접 임한 그 역설적 현실 앞에서 신애는 오히려 절망한다. 이 역설적인 빛의 「은밀한 용서」 앞에서 신애의 환상 - 즉, 은밀한 종교의 자리에서 자기애에 집착하려는 내면의 모든 퇴행적 시도는 철저히 파괴되며, 이제 그 한계가 절망적으로 노출되고 만 것이다.

신애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그녀는 분노 속에 절망하며 신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그녀의 절망은 상당히 무기력하다. 그래서 때로는 코믹하기도 하다. 야외예배에서 ‘거짓말이야 ’라는 CD를 트는 행위나 기도회 장소에 돌을 던지는 행위 등은 다분히 희화적이다. 마지막 저항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것도 단순히 상징적일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죽고 싶지 않다. 그녀는 동맥을 자른 채 살기위해 길거리로 뛰쳐나와 구원을 외친다. 역설적이고 은밀한 하나님의 용서라는 빛 앞에서 절망적으로 노출된 그녀는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다.

Ⅳ. 밀양(密陽)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정혁현 목사(영상문화 연구회 케노시스 대표)는 “역설적으로 그녀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라고 외치는 이 순간부터 신의 존재를 뚜렷이 느낀다. 여기서 신은 라캉의 말처럼 ‘목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다. 인간이 구축하려는 낙원은 환상의 실패를 통해서만 그 존재가 인지되는 ‘낯선 자’이다. 그는 「밀양」- ‘은밀한 빛’이다. 인간이 실패하는 지점에서만 찰나적으로 감지되는 존재이다”라고 날카롭게 평했다. (뉴스앤조이 134 호 3-4쪽)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안에 내재된 관념적 구원의 허구와 인간의 종교적 환상을 날카롭게 파괴하는 ‘은밀한 빛(密陽)’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여기서 신애는 ‘믿음과 사랑(信愛)’이라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이 하나님은 신애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전형적 기독교의 피상적 구원을 사정없이 파괴한다. 이 영화는 기독교의 ‘값싼 은혜’ - ‘값싼 구원론’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 파괴를 통하여 역설적으로 하나님은「神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신애의 교도소 안에서의 종교의식 - 「용서의식」속에는 신의 부재(神의 不在)만 가득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부재의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라고 절규하는 신애의 내면속에 현존하신 것이다.

「神의 부재의 자리, 십자가에서 오히려 현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헨리,나우웬의 메시지가 바로 영화「밀양」속에서 비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본 회퍼’가 말한 「진정한 회개」가 동반되지 않는 「값싼 구원」의 문제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성경 속에서 가르쳐지는 진정한 회개는 철저하게 전인격적(全人格的)인 과정 - 그 자체이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초대 교회의 메시지는 ‘참된 신앙은 언제나 바로 전인격적 회개를 동반한다’고 증언한다.

진정한 회개가 동반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도소안의 살인범의 믿음은 허구이다. 그의 믿음에는 전 인격적인 회개가 없다. 그의 믿음은 정신적 자기 위안으로써의 종교적 신념 - 죄책감을 극복하려는 일종의 심리적 자기 방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의 평화는 얻었을지 모르지만, 신애와의 평화는 없다. 즉, 주관적, 관념적 초월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계가 스스로 반성해보고, 다시 성찰해 보아야할 화두 - 「구원의 피상성」,「용서의 관념성」의 문제이다. ‘사회적 용서가 없는 관념적 용서는 일종의 허구요, 자아의 아편에 불과하다.’, ‘인격적 평화가 이웃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구원은 참된 구원이 아니다’라는 혹독한 자기반성이 기독교 내부에 있어야 한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또한 「신애」자신이다. 그녀가 교도소에 가기 전에 교회에서 평온을 찾았다고 주장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무심코 살인자의 딸이 거리에서 맞고 있을 때, 이를 차갑게 외면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 딸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녀는 여전히 진정한 용서의 변두리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신 「회개와 용서」는 결코 신애와 살인범 양자에서 보이는 관념적 초월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회개’이며 용서이어야한다.

존,스토트목사는 ‘「회심」이란 하나의 긴 과정(a long process)으로써 인격적, 사회적, 문자적 과정을 수반한다.’ 라고 하였다. 이런 진정한 회개가 동반되지 않는 피상적, 관념적 구원의 메시지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과 피해자들에겐 오히려 분노와 절망만을 안겨주는 메시지가 되고 만다. 신애처럼 절망과 분노 속에서 용서에 대하여 아예 문을 닫는 존재를 만들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직시해야한다. 예수님처럼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보는 「현실성」을 견지하는 진지한 자세가 촉구된다. 기독교는 2000년 전 서구 관념론의 세례를 받으며, 어느덧 초월적인 종교로 치우쳐버려, 그 본질적 구원의 메시지조차 변질시켜버린 것은 아닌가? 라는 혹독한 자기 반성이 요구된다.


치유는 어떻게? - 진정한 밀양「종찬」

「신애」곁에는 언제나 종찬이 있다. 그는 얼뜨기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그는 늘 그림자처럼 고통 받는 인간 - 신애 곁에 조용히 있다. 이 ‘언제나 곁에 있어줌’이 바로 진정한 치유다. 그래서 신애가 아픈 병실에서 모든 타인들을 거부했지만, 그래도 끝내 종찬 만큼은 거부하지 못한다. 신애는 살인자의 딸의 머리 만짐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상처받은 존재, 즉 용서받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병든 영혼이지만 그녀 곁에 비밀스럽게 종찬은 언제나 존재한다. 종찬은 그래서 신애의 「비밀스런 햇빛」즉, 밀양(密陽)이 된다.

영화의 라스트 신에서 신애는 스스로 머리를 자르려고 거울을 본다. 신애는 거울 속에서 철저히 환상에서 벗어난 자신 - 처참한 현실 속에서 고통과 직면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종찬은 그것을 직시케하는 현실의 치유자이자 동시에 구원자이다. 여기서 종찬은 또다시 그녀에게 거울을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잘려나간 그녀의 머리카락은 햇빛 속에서 날아간다. 영화의 라스트신은 마당에 고인 질퍽한 개숫물에 반사되는 빛을 반짝 보여주며 끝난다. 빛은 숨어있다. 이처럼, 종찬은 얼뜨기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숨어있는 빛이다. 빛의 비밀은 바로 이런 종찬의 숨겨짐(은닉성)과 직결된다. 빛은 숨어있다. 그리고 그 숨어있는 비밀의 빛은 바로 종찬이다.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밀양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사람사는데가 다 그렇지요”라고 되뇌는 평범하고 빛난 종찬 안에서 빛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치유는 그렇게 평범한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역 앞에서 노방전도 하는 요란한 종교적 의식과 예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랑의 모습으로 말이다. 고통의 현실에 늘 함께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밀양이다.


   교회의 기초와 천국열쇠

김재우
2007/10/19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1]

남은교회
200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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